움푹한 당신

강미정  
땡볕 따글따글한 정오의 나무 그늘이 움푹하네 그늘 없는 평상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는 노인네의 갸울어진 얼굴이 움푹하네 이글거리는 한낮의 열린 창문 속이 움푹움푹하네

   뜨개실을 다 들어내고 바구니 속으로 한 발을 살짝 넣고 아이가 움푹 웃네 바구니 속으로 남은 발을 마저 넣고 아이가 또 움푹 웃네 움푹한 곳마다 다보록한 시선이 놓이네 아이를 안은 바구니가 움푹 웃네

   살기 위해 배를 가른 여자의 눈이 움푹하네 여자가 누운 불 꺼진 방이 움푹하네 어둔 방은 움푹한 아픔을 거우르고 있네 차마 손길을 주지 못한 움푹한 날들을 길게 거우르고 있네 혼자 누운 방에 슬며시 발을 디디면 방바닥이 움푹 꺼지네

   당신은 움푹해서 좋아, 나 거기 들앉아 움푹한 세월이 어찌 갔는지 몰랐네 당신은 움푹해서 좋아, 나 거기 들앉아 움푹한 세상이 어찌 생겼는지 몰랐네 깜깜절벽 움푹한 당신의 집에 담긴 내 가슴이 움푹움푹하네

by 김만석 2011. 5. 9. 07:00


봄을 수리하다/유상옥

지붕과 벽이 매우 낡았다
변색한 구름 몇 장 뜯어내고
물 새는 타일도 가벼운 유리로 바꾼다
뜯어낸 구름 자리에 곰팡이가 슬고
물기가 가득하다
바람 한 장이면 닦을 수도 있지만
남쪽 꽃향기 담긴 마른 소식으로 물기를 없앤다
외부 수리는 돈이 들어도 좋은 페인트를 쓴다
검게 변한 숲을 바다로 칠하고 싶지만
파도의 색깔이 단일치 못하고 한 번 칠하면
교환불가이므로 시간이 걸려도 부분으로 칠한다
연두색 창문은 작년에도 썼지만
고급스러운 회색 맛 곁들이면 집값 올릴 수 있다
조명은 조금 사치스러워지고 싶다
높은 곳엔 진달래 등불 켜고
두견이 봄 읽는 소리 붉게 한다
봉오리 터지는 강가에는 범죄율이 높아
가슴 도둑맞고 입술 잃고 눈물 글썽이는 이들 위해
밝은 빛이 필요하다
호롱불 닮은 제주산 겹살구 등을 주문하자
파랑새 한 마리
개나리 심지 돋우고 있다


by 김만석 2011. 4. 26. 17:17

그 섬에 가고 싶다

김언희


모듬회 접시 한가운데에
그 섬이
있다

난자당한 살점들이 에워싸고 있는, 그
섬에

닿고
싶다

-시집『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민음사)



by 김만석 2011. 3. 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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