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

이덕규


 

혼자서도 비좁은 방이었는데요, 우리
초저녁에 은밀하게 숨어들어가 일찌감치 문 걸어 닫은 방이었는데요 문단속이 완벽해서
아침까지 아무도 열지 못하는 방이었는데요

얼마나 간절했는지, 내 몸속 깊이를 알 수 없는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 밤새 맑은 물을 길어 올리는 일생일대의
거룩한 노동의 노래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는데요

밤새 노를 저어 천상의 다락방에 올랐던가요
신천지 개막처럼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부신 아침 햇살 아래, 우리 처음
세상에 알몸을 드러낸 이슬처럼 부끄러웠던가요

늦잠을 잤던가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나와 보니 방이란 방문은 일제히 다 열려있고
벌써, 말끔했는데요
주인을 아무리 불러도 대꾸가 없어
그냥 가만가만 내려왔는데요
나중에 알고 보니, 날이 새면 영업을 하지 않는 숙박업소였는데요

생애 딱 한 번만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 방, 그때 내가 향기 나는 첫 꽃잠을 달디 달게 자고 나온 방,
오늘 누가 또 곱게 자고 나갔는지
저수지가에 활짝 핀, 그 빈방을 기웃거리다 무심코 묻습니다

하룻밤에 얼마지요? 숙박비


 

by 김만석 2011. 7. 11. 07:00


 

그 안에 섬이 있다

이재현


아니라고 한사코 아니라는 손사래겠지만
네 손금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생명선이 없다
절망일까 헐렁한 가슴으로 달겨드는 물너울을
나는 받을 수가 없네 너와 내가 맹세로 쌓아 둔
벽도 부실하여 비스듬히 돌아눕는 서녘으로
붉다하여 갈매기가 종일 울어대는지
상처 난 부리가 서럽기가 나와 같아라
파도는 그럴라 쳐도 도대체 네 눈금 친 해원
그 어디쯤에 나를 가둔 것이냐
물벼락 치던 갯바위로 떠밀려온 조각배가
바랜 햇살에 산후産後 바람 든 골반뼈를 쬐는지
어지간하게 나른한 다산多産의 주름을 펼친다
여기 일찍이 떠난 인기척을 칵칵 뱉어내는 갈대와
갈기 찢긴 된바람만 말가웃 좋게 서려있을까
민박집 주인 여자가 얼굴에 핀 주근깨를 털며
헤픈 웃음을 흘리는 저녁 어둠을 한 입 물어 뱉는다
그 흔한 섹스도 없이 초저녁잠을 청해보는 낯선 방 안으로
꿈 속 깊숙이 밍크고래를 좇던 겨울바다가 없다

가끔 귀에 익은 짭조름한 파도소리만 자궁 속 가득 차
밤새 부풀어 오른 그 안에 섬이 도사리고 있다



 

by 김만석 2011. 7. 8. 07:00

 

 

푸르고 긴 기차

이나명


찰찰찰찰 기차가 지나간다 끊임없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기차가 지나간다

물빛 창유리를 내다보고 있는 어린 물고기들
조르르 조르르 떼지어 기차속을 휘저으며 놀고 있다

어떤 역에도 정차하지 않는 기차, 찰찰찰찰
끊임없는 소리를 내며 가고 있는 기차속에서
철모르게 놀고 있는 어린 물고기들이 손가락 굵기만큼 자라면
문득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 기차속으로 돌아온다
짧은 실오라기같은 치어떼들이 몰려온다

어디 갔다 돌아왔는지 물 푸른 창유리에
물의 정령처럼 얼비치는 내 얼굴이 보인다
물고기들이 나의 이마와 눈 코 입술 머리카락들을
톡톡 건드린다
내 얼굴이 어른어른 흔들린다

처음도 끝도 보이지 않는 푸르고 긴 기차가 찰찰찰찰
내 속의 보이지 않는 터널 속을 지나간다

 

by 김만석 2011. 6. 1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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