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날 바우덕이 축제에서 바우덕이를 가장 잘 알수있는 덧보기 공연이 있었다.
  바우덕이는 누구인가?, 바우덕이의 인생을 알고 축제를 관람하면 축제를 즐기기에
  더욱 좋을 것이다.





* TIP : 덧뵈기라는 명칭은 말 그대로 덧본다, 혹은 곱본다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탈춤의 형식을 빈 재주이며 마당씻이, 옴탈잡이, 샌님잡이, 먹중잡이의 네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국 곳곳을 섭렵하였던 남사당의 특성상, 덧뵈기에는 본산대(本山大), 양주의 별산대, 해서지방의 가면놀이, 남부지방의 오광대 야유 등이 고루 혼합되어 있으며, 지역성을 벗어난 전문적인 놀이 형태로 팔도를 유랑, 섭렵하던 남사당의 폭을 보여 주고 있다. 다만 남사당들의 본거지가 대부분 경기 지역이었던 관계로 그 근간이 되는 것은 역시 산대놀이 계통이며, 그 위에 각 지방의 특색있는 탈춤들을 곁들여서 오늘날과 같은 형식의 덧뵈기가 완성되었다고 여겨진다. 덧뵈기는 산대도감극(山大都監劇)등속과는 달리, 관(官)의 주관이 아닌 완전한 민중극이었다. 따라서 재담, 음악, 춤사위, 연희 등 절차에 있어서 넘치는 풍자정신과 세련된 연기는 단연 다른 탈놀이를 압도할 뿐만 아니라, 등장하는 탈과 극의 전개 속에서 외래 침략세력의 배척과 봉건적 갈등의 극복이라는 민족적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다른 지역적 탈놀음에 비하여 의식성이나 행사성에 관계없이 그때그때 지역민의 요구와 흥취에 영합하였는데, 춤보다는 재담과 동작 부분이 우세한 풍자극으로 다분히 양반과 서민의 갈등을 상놈의 편에서 의식적인 저항의 형태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탈놀이는 우리 나라 연극의 원초적 형태라고 볼 수 있으며, 고구려의 가면무, 백제의 기악, 신라의 5기와 처용무 등이 토착적인 탈굿과 어울리면서 발전되어 온 것이라 생각된다. 탈의 종류에는 샌님 · 노친네 · 취발이 · 말뚝이 · 먹중 · 옴중 · 피조리 · 꺽쇠 · 장쇠 등이 있는데, 바가지 위에 종이 찐 것으로 요철을 나타내고 눈구멍과 입구멍을 뚫은 다음, 아교 · 백분 · 광물성 분말염료를 배합하여 만드는, 전래하는 전통적인 '아교단청'으로 각 탈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by 김만석 2007. 10. 6. 07:13
 

바람처럼 살다 간 거리의 예인

바우덕이(19세기)


사내들 가운데 웬 미녀 어름사니가

조용하던 마을이 오랜만에 떠들썩하다. 농삿일로 허리 한 번 못 펴던 농사꾼들이 오랜만에 어깨를 들썩이고, 마을 처녀들은 멀리 숨어서 놀이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환하게 흔들리는 횃불 아래 흔들리는 그림자들, 그 위로 어지럽게 퍼지는 흥겨운 풍물 소리. 마당 가운데서는 남사당패들이 신나게 놀이를 펼치고 있었다. 풍물놀이에 이어 버나(대접) 돌리는 묘기도 끝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살판(땅재주)이 이어졌다.

매호씨(어릿광대)와 살판쇠(땅재주꾼)가 나와 서로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더니 갑자기 입을 맞추어 “안암팍이 분명하니 앞곤두부터 넘어가는데 휙휙”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는 휘파람 소리를 내며 갑자기 손을 짚더니 한 바퀴 공중회전을 했다. 어둠 속에 숨을 죽이고 있던 구경꾼들이 벌린 입을 채 다물기도 전에, 살판쇠는 다시 뒷걸음질을 치는가 싶더니 다시 손을 짚고 뒤로 한 바퀴를 가뿐하게 돌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를 내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두 손으로 거꾸로 서서 걷다가 금세 한 손으로 거꾸로 서서 걷기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살판쇠는 “잘하면 살 판이고 못하면 죽을 판이렷다” 하고 신명나게 소리를 지르더니, 껑충껑충 위로 뛰어 몸을 틀고는 공중회전을 하려는 듯 몸을 솟구쳤다. 구경꾼들은 순간 숨을 멈추었다. 그 밑에는 불을 벌겋게 담은 놋화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패했다가는 온 몸에 불을 뒤집어쓰는 것이다. 작년에도 다녀간 적이 있는 살판쇠는 이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묘기를 멋지게 성공했다.

살판이 끝나자 이런 놀이판에서는 보기 드문 미녀 어름사니(줄타기 재주를 부리는 광대)가 나와서 매호씨와 ‘줄고사’를 올렸다. 꽹가리, 징, 장구 소리에 날라리 소리까지 합세했다. 줄타기를 하기 전에 간단하게 지내는 줄고사가 끝나자 장삼에 고깔 쓰고 중 모양을 한 여자 어름사니는 키를 훌쩍 넘게 높이 매단 줄 위로 오르면서 재담 한마디를 하고 나서는 “중 하나 내려온다, 중 하나 내려온다. 저 중 거동 보소. 억단(얽었단) 말도 빈말이오”하고 맑은 목청으로 중타령을 시작했다.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기예로 다져진 날렵한 몸매와 횃불 조명으로 음영이 짙은 미모에 구경꾼들은 잠시 넋이 나갔다. 곧이어 높이 있는 저 미녀를 더 자세히 보려고 일어선 사람들을 앉히는 소리에 놀이판은 잠시 소란해졌다. 그러는 사이 다시 어름사니는 장삼을 벗어 던지고 전복(戰服) 차림이 되어 갖은 걸음으로 재주를 부렸다. 앞으로 걷다가 뒤로 걷다가 줄을 타고 앉아 화장하는 시늉을 하는가 하면, 앉았다 일어났다가 하면서 앞으로 가다가 두 발로 뛰어 돌아앉기도 했다. 움직일 때마다 멍석 깔린 마당으로 그림자가 출렁였다.

구경꾼들이 놀란 가슴을 진정하기도 전에 어름사니는 아래를 향해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구성진 가락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뒷동산 살구꽃은

가지가지가 봄빛이요

곳곳에 푸른 산은

보리밭머리가 풍년이요

어름사니의 노래는 구경꾼들의 귀를 파고들어 기어이 그 마음까지 흔들고 말았다. 살판이 끝나고 탈을 쓰고 노는 덧뵈기가 시작되었어도 그들의 눈은 내내 어름사니 뒤만 쫒고 있는 것이었다.

온통 사내들 판인 남사당패들 가운데 유독 구경꾼들의 눈을 잡아 끌었던 이 가냘픈 여사당은 19세기 말 한때 조선 민중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바우덕이 김암덕(金岩德) 이었다.


안성 남사당패의 꼭두쇠, 바우덕이

삼남의 물산이 모여든다는 경기도 안성. 예로부터 안성시장은 물산이 풍부하고 거래가 활발하기로 유명했다. 연암의 「허생전」許生傳에서 허생이 변부자에게 돈을 빌려 사재기를 한 곳도 안성시장이고 보면 안성시장이 조선 후기 당시 물품 유통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안성맞춤’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질 좋은 유기를 만들어낸 곳이 안성이기도 하지만, 또 안성에서는 많은 소설이 방각되고 출판되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 소설이 출판된 곳은 문화의 중심지였던 서울과 종이가 많이 나는 전주 외에 안성이 거의 유일했다. 이처럼 안성은 물산의 거래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활발한 곳이었다. 게다가 조선 시대 말기의 안성은 남사당패의 주요 터전으로 유명했다.

안성의 청룡사(靑龍寺)는 사당패를 이어 남사당(男寺黨)패의 주요 터전이었다. 일정한 거처 없이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유랑 연예 집단인 남사당패는 겨울이 되면 이곳 청룡사 불당골로 모여들어 지친 몸을 쉬면서 자신의 기예를 다듬고, 새로 들어온 신참들에게 기예를 가르쳤다. 간혹 여자가 한둘 기는 경우가 있었으나 이는 조선 후기에 와서의 일이고, 남사당패는 보통 사오십 명의 독신 남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두머리 꼭두쇠를 정점으로 그를 보좌하는 곰뱅이쇠가 있고, 그 밑으로 각 연희 분야의 선임자인 뜬쇠가 있었다. 뜬쇠들은 놀이 규모에 따라 몇 사람씩 보통 기능자인 가열을 두었고, 가열 밑으로는 초입자인 삐리들을 두었다. 남사당패는 꼭두쇠를 정점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으며 조직의 규율이 엄격했다.

1862년 겨울이 막 끝나가고 얼었던 땅이 조금씩 녹아가는 봄. 안성 청룡사 불당골 볕이 잘 드는 마당에 남사당패들이 꼭두쇠를 선출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오십 명 가까이 되는 남사당패들의 꼭두쇠는 철저하게 다수결에 의해 선출되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 앞으로 표를 던져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면 되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인 바우덕이 앞으로 자신의 표를 던졌다. 바우덕이는 놀란 표정으로 몸을 약간 움츠리는 듯했다. 여자 광대들만 모여 있는 여사당패의 우두머리조차도 남자 거사가 맡는 것이 사당패의 불문율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남사당패의 여자 꼭두쇠라니. 그러나 꼭두쇠를 뽑는 사당패들의 평등한 한 표들은 계속해서 바우덕이 앞으로 날아왔다. 결국 바우덕이는 이날 남사당패의 여자 꼭두쇠가 되었다. 언제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조선 민중들 사이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유랑 연예인 남사당의 역사에 여자 꼭두쇠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바우덕이는 다섯 살 무렵에 안성 남사당패에 들어가 열다섯 살에 꼭두쇠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 출신지가 어디인지 부모가 누구인지조차도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남사당패가 인원을 충원하는 방법이 가난한 농가의 어린이를 응낙을 얻어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가출한 아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던 점을 미루어 바우덕이도 그런 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다섯 살의 나이에 남사당패에 들어간 바우덕이는 어려서부터 기예가 워낙 뛰어나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인기를 독점했다고 한다. 열다섯 살의 어린 처녀아이가 꼭두쇠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패거리들이 놀이판을 벌일 때마다 확인하게 되는 바우덕이의 인기를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우덕이가 이끈 남사당패는 그 패가 곧 ‘바우덕이’로 불릴 정도로 바우덕이 개인의 예능이 단연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어린 처녀로 꼭두쇠가 된 바우덕이는 신명을 바쳐 패거리를 먹여 살려야겠다고 속으로 맹세했다. 그러나 사오십 명이나 되는 식구들이 먹고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는 곳마다 흔히 겪게 되는 천대도 싫고 두려웠지만, 그보다는 먹을 게 없고 잘 곳이 없는 게 더 두려운 일이었다. 바우덕이는 패거리를 이끌고 팔도를 누비고 다니며 놀이판을 펼쳤지만, 놀이패들이 어디서나 환대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놀이판을 한 번 열려고 해도 마을 지주나 양반에게 어렵사리 사전 양해를 얻어야 했고, 그렇게 힘들게 공연을 해도 공연료는 대부분 겨우 먹을 것과 잘 곳을 얻는 것이 전부일 대가 일쑤였다. 그나마 기나긴 장마철은 비 피할 곳도 구하기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이들이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사당패의 놀이를 즐겨 구경했으면서도 돌아서자마자 그들을 더럽고 비천하다고 비난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 그것은 사당패가 남녀 할 것 없이 몸을 팔아 생계를 도모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사당패에 대한 그나마 많지 않은 양반들의 기록이 부정 일변도인 것 역시 바로 이 점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여성으로 거리를 유랑하며 몸을 써서 기예를 판다는 것은 천하디 천한 일로 간주되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기녀는 말하는 꽃, 해어화(解語花)에 불과했고, 보통 사람과 같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기녀는 조선 시대 사람들이 무엇보다 중시했던 정절을 지킬 수 없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녀보다 못한 유랑 예인인 사당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남성과 여성의 공간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고, 집 밖으로의 외출이 허용되지 않았던 그런 시대에 남자들 앞에서 몸으로 재주를 부리는 여성 예인들의 존재는 바로 음란함과 연결되었다. 게다가 사당들은 직접 매춘 행위에 나서기도 때문에 사당은 매춘부라는 인식이 뿌리 깊이 박혀 있었다. 정조 시대의 문인이었던 이옥은 그의 문집에 사당에 대한 기록을 두 편남기고 있는데 이 두 편의 글은 당시 사당이 어떤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 중 하나를 보자.

서울 이남에 무당 같으면서도 무당이 아니고, 광대 같으면서도 광대가 아니고, 비렁뱅이 같으면서도 비렁뱅이가 아닌 자들이 있어, 떼 지어 다니면서 음란한 짓을 하고 있다. 부채 하나 손에 쥐고서 장터를 만나면 연희를 하고, 집집 문전을 따라다니며 노래를 불러 남의 옷과 음식을 도모하는데, 방언에 이를 일컬어 ‘사당’社黨이라고 하며, 그 우두머리를 일컬어 ‘거사’居士라고 한다. 거사는 단지 소고를 두드리며 염불만을 하고, 사당은 오로지 가무만을 행하지 않고 남자를 농락하는 것으로 그 재능을 삼는다. 매양 훤한 대낮,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남자의 입술을 깨물고 손을 끌어당겨, 온갖 꾀로 돈을 요구한다. 그러면서 보통 예사로 여기고, 얼굴은 조금도 붉어지지 않는다. 대개 생명이 유類들 중에 가장 극히 추하고 더러우며, 천리와 인도를 상실함이 이 무리보다 심한 자가 없다.

-역주「이옥전집」, 「봉성문여」鳳城文餘 ‘사당’


여기서 사당은 분명히 연희를 행하고 노래를 불러 먹고사는 존재로 묘사되지만, 동시에 음란한 짓을 일삼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이옥의 눈에는 이들이 기예를 갖춘 예인이라기보다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도덕적으로 음란한 짓을 하는 존재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이 씌어진 지 약 오십여 년 뒤에 활동했던 바우덕이의 경우는 달랐다. 바우덕이가 여사당패에 속하지 않았던 것도 그 한 원인이 되겠지만, 무엇보다 그녀는 뛰어난 재능과 대중적 인기가 있었다. 남자 동료들의 인정을 받아 꼭두쇠가 될 정도로 그 재능을 인정 받았으며,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는 노래가 나올 정도로 상업성도 있는 예인 이었던 것이다.


by 김만석 2007. 10. 5. 23:05
by 김만석 2007. 10. 5.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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