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국수집 5주년을 맞이하면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루가 17,10).

지난 다섯 해를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는 세월이었습니다.

요리전문학원에서 3개월 코스의 한식 조리 과정을 마치고, 2003년 3월 초순부터 민들레국수집을 열기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  사업자 등록도 했습니다.  동구청에 가서 음식점을 여는 허가도 받았습니다.  위생교육도 받았습니다.  보건소에 가서 건강필증도 교부받았습니다. 

겨자씨의 집 식구인 안드레아 형제와 마르띠노 형제가 페인트를 새로 칠하고, 하수구도 만들고, 전등도 달고, 중고 식탁을 사와서 국수집에 알맞게 다시 꾸미고, 깨어진 문짝들도 고쳤습니다.

2003년 4월 1일(화) 만우절에 민들레국수집을 열었습니다.  베로니카와 모니카의 이모님 두 분이 함께 오셨습니다.  예수살이 민들레들도 와서 서툴게 만든 국수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건축가 이일훈 선생도 오셨습니다.

4월 2일(수)에는 아무도 민들레국수집에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3일과 4일은 민들레국수집이 쉬는 날입니다.  4월 5일(토)에 민들레국수집을 다시 열었습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습니다.  안드레아와 함께 거리를 다니면서 손님들을 찾았습니다.  안드레아가 첫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첫손님은 걸을 수가 없어서 안드레아의 조그만 오토바이를 함께 타고 왔습니다.  첫손님은 국수집의 두 계단을 오를 힘도 없습니다.  부축해서 겨우 의자에 앉혀드렸습니다.  국수 한 그릇 대접했습니다.

민들레국수집 1주년(2004년 4월 1일(목))

민들레국수집이 쉬는 날입니다.  우리 손님 한 분이 다른 곳으로 식사하러 갔다가 “젊은 사람이 밥 먹으러 오다니!” 비웃는 말에 아예 민들레국수집이 쉬는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아예 굶어버린답니다.

지난 해 4월 1일에 “1930년경 미국에서 피터 모린과 도로시 데이에 의해 시작된 ‘가톨릭 노동자’ 운동에서 ‘환대의 집’은 교부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소외된 이들을 맞아들이고, 갇힌 이들을 방문하며,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고, 집 없는 이들에게 방을 제공해야 한다는 취지로 문을 열었다. 이 집은 언제나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 고아, 노인, 여행자, 순례자 그 밖의 곤궁한 사람들에게 열려 있었다. 이 집은 가난한 이들에게 따뜻한 안식처이면서 독서실과 직업훈련을 제공하고, 기도와 토론과 공부를 하는 곳이다. 누구나 환영하는 이 집에선 항상 커피가 난로에서 끓고 있었고, 있는 재료를 아무거나 넣고 끓이는 ‘잡탕 찌개’가 난로에서 굶주린 사람들을 기다려 주었다”(잣대는 사랑에서)는 도로시 데이의 환대의 집을 모델로 민들레 국수집의 문을 연지 벌써 한 해가 지났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분들의 많은 도움으로 귀한 손님들과 행복한 한 해를 보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에 우리 민들레 국수집의 귀한 분들이 여섯 분이나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좀 더 잘 해 드릴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참으로 미안합니다. 빌라 옆에 버려진 옷장에서 여섯 달이나 잠을 자면서 지낸 분도 있습니다. 구석진 곳에서 노숙을 하다가 쓰러졌는데 겨우 일어나보니 열흘이 지났다면서 겨우 몸을 추슬러 밥을 드시러 오는 분도 있습니다. ‘피골이 상접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보신탕을 조금 숨겨 놓았다가 이분에게만 며칠 드렸습니다. 며칠 만에 농담을 할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민들레국수집 한 해 동안의 느낌들.

김칫국을 급히 대강 끓였는데 손님들이 맛있다며 국을 더 달라고 합니다.

미나리를 두 시간이나 잎을 떼어내고 줄기만 예쁘게 다듬어서 끓는 물에 데쳤더니 공들인 시간에 비해서 너무나 양이 적습니다. 간장, 깨소금, 고춧가루, 파, 마늘 다진 것을 넣고 참기름 넣어서 무쳤는데 거의 모든 사람이 먹어보지도 않아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이런 정성이 담긴 나물까지 만들어요! 맛있게 드시는 모습이 고마웠습니다.

속이 좋지 않은 분들이 청양고추를 좋아합니다. 어느 날 손님 한 분이 청양고추가 먹고 싶어 하셔서 청양고추를 사와서 고추장에 내어 드렸습니다. 청양고추 하나 드시고 쓰러졌습니다. 119에 실려 갔습니다.  며칠 후 오셨는데, 매운 고추 드릴까요? 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십니다.

우리 손님들 대다수가 밥을 한 그릇 이상씩 드십니다. 두 그릇 아니면 세 그릇까지 드시는 데 몇 분 아주 마음 착하신 분들은 꼭 한 그릇 만 드십니다. 어쩔 수 없이 밥을 꼭꼭 눌러서 고봉으로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400원 아저씨는 군대에서 손가락을 다쳤습니다. 군복무 기간이 남았는데도 기차표 한 장과 빵 사먹으라는 400원을 받고 군 생활을 마쳤습니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신을 자주 깜박 놓으셔서 민들레 국수집을 잘 찾아오시지 못합니다. 옆 골목에서 이리 저리 헤매고 계실 때 모셔옵니다.

안드레아 형제가 대부도에 가서 꽃게를 조금 잡아왔습니다. 간장 게장을 만들었습니다. 모든 분들에게 드릴 수가 없어서 입맛 없어하시는 분들에게만 한 마리씩 드렸습니다. 옆에서 보시던 입맛이 당기시는 분들이 제발 간장 게장의 국물만이라도 달라고 하십니다. 어쩌지요! 그래도 국물만 드렸습니다.

정말 고마우신 분들 덕택에 영양탕을 몇 번이나 끓였습니다. 영양탕을 끓인 날은 밥도 많이 해야 하는 날입니다. 보통 두 그릇 드시는 데 간혹 세 그릇 드시는 분도 계십니다. 어쩌다가 네 그릇째 드시려는 분이 있으면 함께 식사하던 분들이 ‘다른 사람도 좀 생각해야지!’ 꼭 네 그릇째 드시려는 분께는 한 마디 말씀을 하십니다. 다섯 그릇이라도 드릴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민들레 국수집에서 민들레 나물을 무친 날은 참 행복했습니다. 얼마나 손님들이 맛있게 드시는지!  요즘은 당뇨에 특효라고 해서 민들레 구경하기 어렵습니다.

오징어 젓갈을 반찬으로 내면 저는 스트레스가 생깁니다. 얼마나 잘 드시는지 마음껏 드실 수 있게 드리지 못해 마음 아프게 만듭니다.

옷에 청색 테이프를 붙이고 오셨기에 이게 뭐지요? 물었습니다. 옷이 찢어져서 꿰맬 줄 몰라서 청색 테이프로 붙였지요. 그럽니다.
열흘을 굶고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나는 일주일을 굶어 봤어요’ 합니다. 보통 사흘 나흘 정도 굶는 것은 굶은 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죽은 죽어도 먹지 않겠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치아가 하나도 없는 데도요.

길에서 좁쌀을 드시고 계신 분이 있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어느 교회에 갔더니 좁쌀을 줘서 먹고 있다고 했습니다. 밥을 드리니 세 그릇이나 드셨습니다.

고아원 출신인 스물다섯 살 청년이 갈비탕을 처음 먹어본다고 했습니다. 영양탕은 노숙생활을 한 후 처음이라는 분도 계셨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에는 밥 그릇 열 개, 국 그릇 열 개, 반찬 그릇 열 개로 버티다가 올 4월 초에 그릇 열 개씩 더 구입했습니다.

제가 가장 고민스러울 때는 문 열기 전에 귀한 손님들이 오셨을 때와 문을 닫고 설거지를 하는 시간인데도 찾아오신 분들을 만날 때입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그래서 손님에게 물어본 다음에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배고프신가요?’ ‘배고프다’고 한다면 언제든지 식사 대접을 하기로 했습니다. 배 고프시다는 데 어쩝니까!

지금까지 우리 손님들이 잘 드시는 음식은 영양탕! 갈비탕, 삼계탕, 쇠고기 무국, 곰탕, 감자탕, 쑥국, 민들레 나물, 멸치 볶음, 김, 간장 게장, 오징어젓갈, 닭볶음, (소불고기는 한 번도 내지 못했고요), 고등어자반, 비빔밥, 수제비, 자장면, 청국장, 갈비찜, 깻잎조림, 달걀 프라이, 상추쌈, 풋고추, 냉이 된장국, 꽁치 조림, 추어탕, 떡국, 파김치, 돼지 불고기, 닭백숙 등등입니다.

민들레의 집 식구가 감기에 걸려 기침을 심하게 하면서도 참 좋다고 합니다. 노숙할 때는 빈집에서 자거나 길에 버려진 장롱 속에 들어가 잘 때는 기침이 나오면 꾹 참았다고 합니다. 기침을 했다가는 거기에서 쫓겨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젠 기침도 마음껏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마음씨 고운 제주 할머니가 나흘 전에 시장에서 맛나 보이는 튀김을 샀습니다. 치아가 하나도 없으신 데도 불구하고 두세 개를 드셨는데 그만 체하셨습니다. 사흘을 아무 것도 드시지 못하시고 혼자 아프셨답니다. 맛나게 식사를 드신 후에 만원을 바꿔 달라십니다. 바꿀 돈이 없다고 말씀드리니 주저하지도 않으시고 돼지 저금통에 넣으시려고 합니다. 급히 가게로 달려가서 잔돈으로 바꿨습니다. 천원을 돼지 저금통에 넣으시며 웃으시는 모습이 참 예쁩니다.

우리 손님들이 민들레 국수집을 자기 집처럼 찾아오면 참 좋겠습니다. 얻어먹는다는 미안한 마음을 버리면 더욱 좋습니다. 동정이나 시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좋겠습니다. 자기 몫을 찾아 먹는 것인데도 왜 그리도 어색해 하는지 마음이 아픕니다. 하느님은 이미 모든 것을 주셨는데두요!

민들레 국수집 주변에는 가난한 이웃이 많습니다. 밑반찬을 자주 가져다주시면서도 생색을 내시는 분이 한 분도 없습니다. 또 시장이나 이웃 가게에서 물건을 사면 너무 많이 덤을 주셔서 제가 시장 가격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민들레국수집 2주년(2005년 4월 1일(금))

만우절입니다.  2003년 4월 1일에 거짓말 같은 일을 벌였습니다.  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대접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맘껏 눈치 보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음식, 배부르게 먹은 다음에 꽁초가 아닌 성한 담배 한 대 피울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커피든 녹차든 마음대로 타서 먹어도 되는 곳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세상에 어느 누군들 잘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잘 살아라는 잔소리도 하지 않는 곳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지난 이 년 동안 참으로 많은 분들이 오셨고 또 떠나가셨습니다.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하루하루가 기적이었습니다. 

23년간을 교도소에서 징역살이로 보낸 박진국 아저씨는 노숙을 하더라도 다시는 교도소로 가지 않는다더니 그만 계단에 굴러 떨어져 돌아가셨습니다. 노숙하는 분들 중에 제일 점잖았던 안민수 씨는 복수가 차서 아무 것도 먹지 못할 때 묵을 요리해 드리면 그나마 조금 드셨는데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자기 눈에 보이는 쓰레기는 전부 줍던 착한 종덕씨도 가셨고, 용재님도 가셨고, 자유공원에서 외롭게 혼자 지내던 수열씨도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요. 뜨거운 것은 드시지 못해서 항상 찬물에 밥을 말아 드시던 무안 할아버지는 이제 하늘나라에서 따뜻한 밥을 드실 것입니다.

열흘을 굶고 기어서 국수집을 찾아오셨던 동렬씨는 어디에 계실까? 시설에서 지내기보단 길에서 죽겠다며 하인천역 근처 공터에 버려진 차가 집이었던 분은 몸도 불편한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소주병을 끝까지 고집하다 피를 토했던 성호씨는 어떻게 되었을까? 좀 더 잘 해 줄 걸 매정하게 대했던 것이 후회스럽기도 합니다.

쌀이 떨어지는 것이 보기 싫어서 도자기 쌀독으로 바꿔 놓고 남몰래 얼마나 있나 살펴보던 때가 어제 같습니다. 그래도 기적처럼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습니다. 참으로 기적입니다. 배고픈 우리 손님들은 당신보다 더 배고픈 사람이 먹을 수 있게 숱하게 양보해 주시기도 하고요.

절망 속에 술 밖에는 위안 받을 길이 없었던 분들의 아픔과 괴로움도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어느 날 술을 끊어버리신 참으로 대단한 용기에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경석씨는 여섯 달을 주정하시다가 이젠 재미없다면서 끊어버리셨고, 영애씨도 끊을 수 없다던 술을 끊고 행복하게 지내시고, 인간극장 첫 머리에 술이 취해 싸우던 만식씨는 술을 안 먹으니 이렇게 좋은 걸 하시며 다른 곳에서 무료급식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많은 분들이 착하고 예쁘게 변했습니다.

지금의 민들레 식구들인 대성씨, 종민씨, 정근씨, 상영씨, 주헌씨가 서로 돕고 섬기고 나누는 모습을 보는 것도 참 행복한 일입니다.

이제 민들레국수집의 사정이 허락된다면 조금만 더 늘려서 열 분이라도 앉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손님들이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노숙하는 사람들의 소원인 낮잠 잘 수 있는 조그만 쉼터도 만들고 싶습니다.  그런 꿈을 꿉니다.

민들레국수집 3주년(2006년 4월 1일(토))

겨우 여섯 명이 비집고 앉을 수 있는 식탁 하나 놓고 시작한 민들레 국수집입니다.  제가 잔머리를 굴렸습니다.  이토록 작은 식당이니 손님이 물밀듯이 밀려온다고 하더라도 몇 명이나 들어와서 앉을 수 있겠습니까?  겨우 여섯 명이 앉을 수 있습니다.  그저 쉽게 국수나 말면 힘도 별로 들지 않고 소일거리도 생기고 혼자서 큰소리 뻥뻥 치면서도 견뎌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제 꾀에 제가 속은 것인지 바보처럼 만우절에 민들레 국수집을 시작했습니다.

민들레국수집의 손님들을 대접하고도 조금의 여유만 생기면 조그만 방을 하나씩 얻었습니다.  제정원 신부님께서 단칸방을 얻을 수 있는 보증금을 도와주실 때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습니다.  다현이 아빠가 돈을 빌려줄 때 너무 너무 고마웠습니다.  기차길옆 작은학교에서 백만 원을 빌려주지 않고 선뜻 나눠 줄 때 고마웠습니다.  해남의 사베리오 회장이 이자 없이 빌려준 백만 원이 얼마나 귀한 돈이었는지요.  그렇게 조금씩 늘린 민들레의 집 식구들이 어느새 열 분이나 됩니다.

민들레 국수집도 다사다난했지만 민들레의 집도 그에 못하지 않습니다.  몇 분의 민들레 식구들은 정상적으로 사회에 잘 복귀했고요.  몇 분은 가슴 아프게 떠나기도 했고요.  그래도 잘 된 분이 더 많으니 대 성공은 대성공입니다.

2006년도 4월 1일은 다행스럽게도 토요일입니다.  고마운 분의 도움으로 개업 기념일에 민들레국수집을 찾아오시는 우리 vip 손님들을 푸짐하게 대접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학익동에 계신 분이 보내 주신 사골과 서울 가와 건축의 고마운 분들께서 도와주신 쇠고기 양지머리를 푹 고아서 맛있는 쇠고기 국을 끓였습니다.  이밥에 고깃국으로 우리 손님들이 행복해 했습니다.

쌀이 떨어질까 걱정이 되어서 도자기 쌀독에 쌀을 담아 놓았습니다.  가슴 졸인 세월이 길었습니다.  그런데 배고픈 분들과 나누시려고 전국 각지에서 보내주시는 귀한 쌀을 이제는  동네의 어려운 분들과도 나눌 수 있습니다. 

민들레국수집을 처음 시작했을 때 국수를 좋아하는 저는 쇼크에 쇼크를 받았습니다.  배가 나온 제가 배고픔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손님들이 정말 입맛을 다시며 맛있게 드시는 모습이 눈물 났습니다.  중국집 우동 그릇에 그것도 고봉으로 수북이 담은 밥을 두 그릇이나 게 눈 감추듯 드시는 손님을 보고 제 가슴을 쳤습니다.  일곱 시간 동안 문을 여는 민들레 국수집에 일곱 시간 동안 다섯 번이나 찾아와서 정상적으로 다섯 번 식사하시는 분을 보고 제 가슴을 쳤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분을 뵙기가 어렵습니다.  모든 분들이 보통 사람들처럼 조금만 먹으려고 하고요.  더 나아가서는 다이어트를 한다고도 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서울역과 용산역과 영등포역과 부평역과 주안역에서 오시는 새로운 손님들 덕택에 또 가슴이 아파지려고 합니다.  어찌나 많이들 드시는지요.  서울역에서 오신 손님이 말하기를 서울역에서 주는 음식과 이곳 음식과의 차이를 함바집과 호텔 차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는 민들레국수집에서 하루 온종일 식사하신 분이 삼백 분이 넘는 기적 같은 일도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정말 바빴습니다.   

하느님!  고맙습니다.


민들레국수집 4주년(2007년 4월 1일(일))

“우리가 토끼야!  밥상이 온통 풀밭이야.”  두 해 전인가 우리 손님인 어린 친구 동균이가 싸이월드 미니홈피 방명록에 올려놓은 글입니다.  동균이는 스무 살 때부터 단골손님입니다. 약간 지능이 떨어집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집을 나와서 떠돌아다닙니다.

쪽파는 데쳐서 초고추장에 무쳐 놓았고요.  시금치도 데쳐서 무쳐 놓고, 쑥갓도 데쳐서 나물을 만들어 놓고, 콩나물도 만들어 놓고, 취나물도 만들고, 마늘쫑은 싱싱한 제주도산 마늘쫑으로 매콤하게 무쳐놓았고요.  김치와 상추 그리고 상추 쌈장.  소머리뼈 푹 고아서 파 송송 썰어 국에 넣어드립니다.  소금은 직접 간 맞추시도록 합니다.  소금 욕심을 내는 분들이 많아서 국을 드릴 때마다 잔소리합니다.  제발 소금 조금만 넣으세요.  후추는 내어 놓지 않고 소금과 섞어 놓습니다.  후추도 한 수저나 넣어서 드시지 못하는 분들이 많아서 후추 통은 절대로 상에 내어 놓지 않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서 햄과 소시지 전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민들레국수집 5주년(2008년 4월 1일(화))

“수사님 언제 생일이셨어여?  저는 몰라져서여.  죄송하고여.  민들레국수집 반찬이 넘 맛있어서.  자꾸 또 먹고 싶어집니다.  수사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몸 건강 하세여.”강동균이 저의 미니홈피 방명록에 얼마 전에 올려놓은 글입니다. 

동균이는 우리가 토끼야!  밥상이 온통 풀밭이라고 불평했던 친구입니다.  이제는 밥과 반찬이 마음에 드는 모양입니다.

아주 옛날에 작고 예쁜 꿈을 꾸었습니다.  산자락에 조그맣게 있는 달동네에서 마음 착한 이들과 어울려 사는 꿈을 꿨습니다.  느슨하게 서로 돕고 어울리면서 사는 공동체였습니다.  도로시 데이의 환대의 집처럼 가난한 이들이 언제든지 들어와서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쉬고 그러면서 한 사람 한 사람 따로 살 수도 있는 곳.  그러면서도 느슨한 공동체.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 손님이 한 분 술에 취한 모양입니다.  반찬이 맛이 있네.  없네.  불평하면서 미적거립니다.  옆에서 곱게 밥 먹는 사람을 집적거리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시끄러워질 것 같습니다.  거의 한 시간 만에야 밥을 다 먹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일이 터졌습니다.  봉사자 자매님들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합니다.  보다 못해 제가 말렸습니다.  저에게 끝없이 욕을 합니다.  스스로 지쳐서 떠나갔습니다. 

술이 깨면 가슴을 칠 것입니다.  한 동안 밥 먹으러 오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 후 잊혀질만하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면 씩 웃어줍니다.  배 고플테니 어서 들어가 밥 먹으라고 합니다.  식사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면 담배 한 대 권하면서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잘못을 하면 스스로 자기에게 벌을 내립니다.  민들레국수집으로 다시 올 때까지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았겠습니까.  스스로 받을 벌을 다 받은 셈이니 떡 하나 더 주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배부르게 한 다음에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변하는 것 같습니다.  못된 시어머니 밑에서 매운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가 나중에 시어머니가 되면 자기 시어머니보다 더 못된 시어머니가 된다고 합니다.  미워하면 미운 사람을 그대로 닮아버립니다.  미운 것도 참기가 어려운데 미운 사람을 닮아버리면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습니까.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기 전에 미운 사람에게 떡 하나 더 주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정말 손님들이 많이 옵니다.  아침에 쇠고기 미역국을 커다란 솥으로 한 솥 끓였습니다.  하루 온종일 손님 대접하고도 남는 양입니다.  그런데 오후 2시쯤 떨어졌습니다.  밥이 뜸이 들지 않아서 잠깐 쉴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정말 손님이 많이 온다고 합니다.

콩나물도 4킬로그램으로 두 상자를 나물로 무쳤습니다.  시금치도 평상시보다 두 배는 더 마련했습니다.  돼지불고기는  여든 근 정도 나갔습니다.

열시 전부터 손님들로 꽉 찼습니다.  기다리는 손님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한 손님이 나가면 곧바로 한 손님이 들어오기를 저녁때까지 했습니다.  이젠 35인용 밥솥 세 개인데도 밥이 떨어질 뻔했습니다.  날씨는 춥고, 국수집은 좁고, 자리는 모자라고 참 대책이 없습니다.

우리 손님들은 참 착합니다.  반찬이 수북하게 담겨져 있으면 먹고픈 만큼 양껏 드십니다.  그런데 담겨져 있는 반찬이 적으면 다음에 먹을 사람을 생각해서 조금만 가져갑니다.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조금 남은 반찬이 깨끗하게 비워지면 다시 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조금 남아 있으면 착한 손님들이 다음 사람을 생각해서 조금만 가져가던가 아니면 안 가져가십니다.  그걸 오 년만에야 눈치 챈 저는 참 어리버리 합니다.  앞으로는 반찬이 충분이 있으면 우리 손님들이 잘 드시도록 충분하게 내어놓아야겠습니다.

요즘 민들레국수집을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한쪽 눈이 실명되었습니다.  식사를 참 많이 하십니다.  국도 오늘은 세 그릇이나 드셨습니다.  쉴 곳을 찾아 떠나면서 '오늘은 어디서 자나.'  혼자서 중얼거립니다.  내일은 국수집 문을 열지 않는데  어떻하지요?  그랬더니 '내일은 굶어야 하나.'  가슴 아프게 합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루가 17,10).

by 김만석 2008. 3. 30.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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